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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인 2월 4주 GQS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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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16-02-1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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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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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인 2016년 1/2월호, pp. 290-291)
2월 4주 | 십자가의 제자도
본문|마가복음 9:30-37 (2월 28일 본문)
찬송|새216 통356 (성자의 귀한 몸)
핵심 구절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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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 열기
예수님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했던 가장 큰 손해는 무엇입니까?
2. 본문 이해하기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권세를 보여주신 후에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죽임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본을 보여주심으로 뭇 사람을 섬기는 삶인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3. 말씀으로 나눔하기
①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자들 (30-32절)
예수님이 죽임당해야 하실 것을 두 번째 말씀하셨지만 이번에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속사적 요구와 흐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물어봐야 하는데 이처럼 고난받고 손해볼 것 같은 일은 본능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내가 암묵적으로 즐기고 있지만 더는 못하게 될까 봐 묻기도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2절)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 전부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도를 정한 채,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부분은 말씀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두려 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취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옛사람의 자아는 죽어야 한다는 것은 두려워 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화를 넘어 영화에 이르도록 우리의 전인격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감추고 덮어두고 미루고 있는 부분을 고난을 통해 결국 끄집어내셔서 하나님 앞에 두 손 들어 항복하게 하십니다. 이 과정이 고단하고 서글픈 것 같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숨은 죄를 드러내어 죽일 때,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평강과 안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맛을 본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② 십자가의 원리 (33-35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이때, 제자들은 십자가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 채 서로 큰 자가 되고자 다투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과 상관없이 제자들처럼 쟁론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4절)
높은 곳에 오르고 싶고 사람들이 나를 섬겼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그와 반대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구원의 여정은 ‘누가 크냐?’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와 일치합니다. 세상 가치관은 왕이 되어 군림하는 자가 큰 자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정점에 오르길 꿈꾸라고 선전하고 압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가치관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고, 다른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종으로 자처함을 기뻐하는 자가 큰 자라고 합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아비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내가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의 희생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속내를 아시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묵묵히 주어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③ 가장 낮은 곳에 계신 주님 (36-37절)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당시 어린아이는 사회적 소외 계층이었고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작고 힘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는 보상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지체에게도 마음을 다해 그를 섬기고 환대합니까?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영접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까? (37절)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 적용을 하고 나서도 우리는 세상적인 보상을 기대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 사랑으로 대했는데 상대방으로부터 행여 오해와 조롱, 핍박을 받으면 마음이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이럴 때 주님은 상대방을 포기하고 마음에서 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체휼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일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영양가 있는 사람만 영접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이 땅의 것으로 갚음 받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4:12-14). 복음을 전하면 분명히 나를 핍박할 것이라 생각하고 포기한 영혼이 있다면, 다시 마음에 품고 예수님께 이르게 하는 생명의 도(道)를 용기 있게 전하시길 바랍니다.
4. 구속사로 해석하기
엄격한 징계를 받고 사람이 잠시 변하는 것 같아도 마음의 근본까지 바뀌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렇게 해주시기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묵묵히 대신 받아주셨습니다. 그 희생과 섬김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아끼시는지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마음의 감동과 자원함이 생기고 근본부터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이 원리로 우리도 주님의 삶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런 수직적인 계급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와 전혀 맥락이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수평적인 평화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완벽한 방법이 십자가의 제자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본을 따라 낮은 자를 자처하고 작고 연약한 자를 섬김으로 십자가 복음 앞에 세상을 평균케 하는 제자들입니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
개인|낮아짐과 희생을 기피하려는 죄인의 본성이 저에게 아직 살아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의 그 깊은 원리를 깨닫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공동체|이 땅 가운데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며 복음 앞에 세상을 평균케 만드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진리 안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이 세상에 중매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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