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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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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닷컴] 종교개혁자 코메니우스, 죄고백과 건강한 신앙공동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안지훈 작성일 19-03-25

본문

-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에서 죄고백과 관련된 건강한 신앙공동체운동의 의의

한국대학기독총장포럼(회장 정상운 교수), 큐티선교회(QTM: Quiet Time Movement), 우리들교회가 주최한 김양재 목사의 큐티목회 철학(THINK)에 대한 신학적 고찰, 제1회 THINK Forum ‘공동체와 고백’이 10월 17일 오후 2시 우리들교회 판교채플에서 개최됐다.


THINK란,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의 큐티목회 철학으로 Telling(고백), Holifying(거룩), Interpreting(큐티), Nursing(돌봄), Keeping(적용)을 가리킨다. ▲고백=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살아난 이야기 간증, ▲거룩=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목적으로 둔 성도의 삶의 방식, ▲큐티=구속사적 말씀묵상으로 삶을 해석하는 과정, ▲돌봄=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를 돌봄, ▲적용=말씀에 따라 십자가 지는 적용으로 가정과 이웃을 살림을 의미한다.

 

제1회 THINK Forum ‘공동체와 고백’이 열린 우리들교회 판교채플


포럼은 정상운 교수(전 성결대 총장)의 사회로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이규민 교수(장신대 석좌)가 발제를 맡고, 김대진 박사(코닷 편집장)가 목회적 적용을 제언했다.

정일웅 교수는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에서 죄고백과 관련된 건강한 신앙공동체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진젠도도르프(N.L. Zinzendorf)가 이끈 모라비안교도였던 코메니우스(J.A. Comenius, 1592-1670)는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얀후스(J. Hus, 1369-1415)의 후예로 형제연합교회(Unitas frartum)의 목사이자, 그 공동체를 이끌었던 3번째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었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가진 ‘죄고백’의 신학과 신앙고백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경건운동과 삶의 개혁운동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다, ▲경쟁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잠자는 한국교회의 영성을 일깨우는 새로운 영적도전이 분명하다, ▲기독교영성의 근본토대는 믿음, 사랑, 소망의 신학이며, 그것은 경건의 참된 목표이면서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죄고백운동’의 신학적 표준이고, 근본토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면서, “▲형제연합교회의 신앙특정 4가지(①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는 신앙, ②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순종, ③사랑의 훈육, ④교회의 자유)는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신앙공동체의 모범”이라고 강조했다.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또한 “▲교회연합정신은 한국교회에 만연된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할 중요한 방편이 되리라 확신한다, ▲코메니우스와 형제교회연합교회가 우리들교회의 ‘죄고백’을 더욱 성숙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를 기대한다.”고 피력했다.

다음은 정일웅 교수 논문 전문이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에서 죄 고백과 관련된

건강한 신앙공동체운동의 의의

정일웅교수(전 총신대총장,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시작]

형제연합교회는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보헤미아(체코공화국)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J.Hus,1369-1415)의 후예들이며, 코메니우스(J.A.Comenius, 1592- 1670, 모라비아)는 후스의 개혁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았던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의 목사요, 또한 그 공동체를 이끌었던 3번째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었다. 그는 가톨릭의 종교박해로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형제연합교회를 이끌고 일생을 망명생활로 외국에서 보냈으며, 30년 종교전쟁을 종결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1548)에서도 기대했던 종교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교회를 해산하고, 감독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그 당대에 교육학자로 이름나 있었으나, 정작 그가 신학자였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최근, 코메니우스에 관한 유럽학자들의 연구는 그가 신학자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또한 17세기에 일어난 유럽경건주의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그가 남긴 미완성 유작인 “인간사 개선에 대한 포괄적 제언” (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onsultatio catholica)이란 라틴어원고가 1935년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본산지인 할례(Halle)에서 발견되면서, 코메니우스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신학자요, 철학자요, 교육자로서, 그리고 경건주의운동가로서 삶의 개혁자로서, 희망의 신학자로서 그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92년이 체코가 공산권에서 해방되어 자유화되는 해였고, 또한 코메니우스 탄생 400주년의 해로, 체코정부는 코메니우스를 제2의 국부로, 내 세워 존경하고, 그의 학문과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제1종교개혁의 후예들인 형제연합교회(Unitas fra- trum)에 관하여 그들의 역사와 신학과 신앙전통을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우리들교회 목회자이신, 김양재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간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를 설립하고,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사상 알리기에 주력해 온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큰 보람을 느끼게 된다.

논문 전체의 내용은 첫째, 코메니우스가 누구인지? 그의 생애와 활동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며, 아울러 현대 신학자들의 평가에 근거한 코메니우스의 신학적인 위치를 밝혀보았다. 둘째, 이상적인 신앙공동체를 지향했던 코메니우스의 신학과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와 신앙의 특성을 소개하며, 셋째,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가 이해한 죄고백의 신학적인 이해와 그 실제를 유추해석하며, 넷째,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을 상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논문의 결론에서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의 신학이 죄고백과 관련하여 건강한 신앙공동체로서 보여주는 의의(교훈)가 무엇인지를 밝혀보았다.

1. 코메니우스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그의 신학적인 위치

1) 코메니우스는 누구인가?

코메니우스는 1592년, 보헤미아(Bohemia, 체코공화국)의 남쪽, 모라비아(Moravia)의 우헤르스키브로드(Uhersky-Brod)근처 니브니체(Nivnice)라는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10-11세), 고아가 된 코메니우스를 그의 고모가 슬로바키아(slovakia)국경 근처에 있는 스트라츠니체(Straznice)로 데려다가 돌보았다. 그 때문에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농사일과 수공업을 배우면서 자랐다. 16세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가 남긴 얼마의 유산이 발견되어, 그 덕택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프레로브(Prerov)에 있는 형제연합교회가 운영하는 라틴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뒤늦게 학교에 들어갔지만, 그의 총명한 머리는 숨길 수가 없었고, 그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형제연합교회가 그를 주목하고, 장차 그 교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독일에 있는 헤어보른(Herborn)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이름은 원래 체코어로 코멘스키(Komensky’)였으며, 그것은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콤나(Komna)에서 온 자’란 뜻을 가진다. 청년기의 대학 생활에서 선지자 아모스(Amos)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얀(Jan)뒤에다 붙였으며, 코멘스키를 라틴어로 표기하여 코메니우스(Comenius)로 불렀다.

코메니우스는 그곳 대학들에서 훌륭한 선생들의 학문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먼저 헤어보른 대학에서는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J.H.Alsted)교수로, 그에게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특히 백과사전의 작업, 그리고 철학적인 사고인 범지혜(Pansophia)에 관하여 큰 도움을 입었다. 그리고 요하네스 피셔(J.Fischer)교수에게서는 성경과 성경해석의 중요성에 관한 것으로,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천년왕국 사상과 기독교의 종말 사상에 관하여 배웠다.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는 다빗 파레우스(David Pareus)교수이며, 그는 그 당시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 분쟁을 극복하고 서로 화해와 연합을 힘쓰는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었고, 코메니우스는 그에게서 평화사상과 교회연합사상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독일에서 교수학(Didactic)의 전문가인 볼프강 라트케(W.Ratke)교수의 교수학적인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게 되었고, 후에 그의 ‘대교수학’ (Didactica magna)에서 교수학사상을 새롭게 발전시킨다.

코메니우스는 대학시절의 학업결과는 놀라운 정도였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에 정통하였으며,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관하여도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에 정통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세네카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 당시 유럽에서 이름나 있던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비베스(J.L.Vives)와 신학, 철학, 자연과학 등도 수용하였으며,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과 토마소 캄파넬라(T.Campanella)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았다. 후에 근세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Descartes)를 만나 교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코메니우스사상의 중요한 근거들로 확인되고 있다.

 

2)코메니우스의 작품과 그의 활동

코메니우스는 그의 생애 동안에 많은 저술과 활동을 하게 되는데, 문서로는 약 150여 종 이상을 작성하여 책으로 출판하였고, 많이 분실되었지만, 상당수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는 1614년 대학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프레로브(Prerov)에 라틴어 교사로 활동한다. 그리고 후에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교육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 1616년에 플렉(Fulnek)에 있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었고, 1618년 결혼을 하였으며, 또한 그곳 학교의 교장으로 일한다. 풀넥의 교회를 맡게 된 것은, 그곳 대부분의 교회구성원들이 독일 브란덴부르그 출신인 왈도파 신도들의 후손들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메니우스가 그 교회의 목회사역에 적임자로 추천되었기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풀넥의 목회사역이 불과 3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1618-1621), 그곳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특히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정의에 관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의 주요작품인 “하늘로 보내는 편지”가 유명한데, 사회적인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글이었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편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내고 받는 편지 등, 4개의 편지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곧 은둔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유는 보헤미아의 정치적인 상황이 형제연합교회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형제연합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벌써 1618-1620년에 사이에 프라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세력과 가톨릭 편에 서 있는 황제를 중심한 반종교개혁세력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정권찬탈을 시도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은 반종교개혁세력의 대항으로 결국 1620년 11월 프라하 근교, 백산 전투에서 대패하여, 보헤미아는 다시 가톨릭교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싸움은 유럽사회 전체를 파괴했던 30년 종교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은둔생활에서, 코메니우스는 가장 슬픈 비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흑사병으로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잃게 된 일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적인 슬픔을 억누르고, 그때 쓰게 된, 유명한 책이,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Die Labyrinth der Welt und das Pradies des Herzens)이다. 이 책은 코메니우스가 경험했던 인간의 모습과 사회적인 삶의 형태를 비유적이며 풍자적인 형태로 그린 것이다. 역시 이 책은 서사시적인 형태로 작성되어 체코인들이 많이 읽는 고전작품 중 하나로 유명한 책이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1522-1525년에도 ‘슬픔에 슬픔을’, ‘위로에 위로를’ 등의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형제연합교회의 성도를 위로하는 위로서가 되었다. 그리고 3번째 위로의 책은 “안전의 중심”(Centrum securitatis)이란 책이다.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을 삼각 구도로 하는 코메니우스의 사상이 드러나게 된다. 이 글은 세상이란 바퀴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세상의 사물들은 방사선 모양으로 혹은 바퀴의 살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중심부 주변을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즉 각각의 피조물은 두 개의 중심부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시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이시며, 다른 하나는 자시 자신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자신의 독특성과 본성이다. 이러한 중심개념은 코메니우스에게 있어서 확고부동한 위치이자, 동시에 역동적인 관계성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은 내적인 하나님과 외적으로는 회전하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적 사명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이중적인 사명을 놓치는 것이 인간의 실수로서,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미로에 등장하는 호기심처럼, 피조물에 몰두하는 일이다. 피조물에 몰두함으로써 인간은 그에게 주어진 본래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되며,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부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으로, 이것이 모든 악의 시초가 되는 것으로 코메니우스는 보았다.

코메니우스의 글들은 대부분 성경의 내용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것은 코메니우스에게서 성경은 끊임없는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제공하는 위로의 샘이었고, 지치지 않게 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신의 고난을 보며, 그 자체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염려하며, 전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자요, 부활하신 자일 뿐 아니라, 역시 형제연합교회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유일한 왕으로 ‘도래하고 있는 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앙의 확신이 코메니우스가 인생의 어려운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그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현세에서 풍성한 결실을 이루게 된 것들을 빼앗기고 잃어버리게 될 때에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팔에 붙들린 자신을 확신하고 있는 한, 아무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코메니우스는 그의 이 모든 글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에 처하게 된다. 그 이유는 1627년 보헤미아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갱신된 국가법’이란 것을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의 모든 신분 계층들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톨릭의 합스부르그 가문이 모든 권세를 쥐게 되었고, 보헤미아는 완전히 가톨릭의 세상이었다. 결국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더 이상 고국 보헤미아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폴란드 리싸(Lissa)에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곳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의 젊은 목회자인 코메니우스가 사전에 그 망명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와 함께 리사(Lissa)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먼저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1628-1641년까지 13년을 보내면서 많은 책들을 쓰게 되었고, 또한 그가 여기서 보헤미아를 넘어서 유럽 사회에 알려진 인물이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1648-1650년, 1654-1656년에도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와서 거주하였다.

그는 이곳 리사의 인문 고등학교 교사로, 후에 교장이 된다. 그리고 1632년에 형제연합교회의 총회서기가 되었다. 분주한 일과에서도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쓰게 되는데, 먼저 교육의 목적, 목표, 아이들에 대한 이해, 그들의 무엇을 어떻게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인지, 교수 방법을 제시한 교사지침서인 ‘보헤미아의 교수학’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대교수학’이란 이름으로 다시 수정 보완하여, 그의 교육학 총서 첫 번 내용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까지 가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 것인지? ‘어머니 학교의 소식’이란 부모교육지침서도 출판하였다. 그리고 ‘열려진 언어의 문’, ‘자연과학개론’등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이 책들은 모두 학생들이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1637년에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책을 만들게 되는데, 이 책은 코메니우스가 생각해 온 교육철학의 핵심주제인 ‘모든 지혜’(Pansophia)로 모든 사람을 철저하게 교육하려는 범지혜의 교육계획서였다. 라틴어로 작성된 이 책이 1638년 영국에서 출판되면서 코메니우스는 일약 범지혜의 철학자로, 그리고 교육학자로 그의 이름이 유럽의 지성인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640년대의 코메니우스는 이 책으로 인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초청을 받게 된다. 먼저 파리에 있는 가톨릭의 추기경 리헤리우(Richelieu)가,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파리에 ‘범지혜의 대학’을 세우려 하였고, 영국에서도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범지혜의 대학’과 영국의 국가교육계획을 개혁하도록 맡기려 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도 코메니우스는 학교 교육에 필요한 교재 집필로 초청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 미국 마세추세츠 주에서 하바드 대학이 설립되면서, 코메니우스를 초대총장으로 초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 모든 초청들에 다 응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책임지고 있는 형제연합교회를 돌보아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다만 영국의회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곧 영국 내의 종교대립으로 인한 시민혁명이 일어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약 9개월 동안 런던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영국의 체류 동안에 코메니우스는 ‘빛의 길’(Via Lucis)이란 그의 범지혜의 교육철학에 근거한 학교교육개혁에 연관된 문화정치적인 책을 집필하였고, 후에 암스테르담에서 1668년에 출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1642년 6월 영국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도중에 암스테르담에 들리게 된다. 여기서 그는 스웨덴의 초청을 받도록 힘썼던 데 기어(Louis de Geer)를 만났으며, 또한 라이덴 근처, 엔데게스트성(endegeest)에 머물고 있던 데카르트(R.Descartes)도 만나게 된다. 물론 두 인물의 만남은 각각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준비했던 일이며, 오래 살았던 코메니우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데까르트와의 역사적인 만남을 상세히 기록하여 전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서로의 학문적인 경의를 표하였고, 데까르트는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의 철학과 세계 공용어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였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수학적인 사고방식과 엄격한 검증에 감탄하였으며,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생각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서의 차이점은 이성 중심의 인식에 관한 것인데, 데까르트가 그의 모든 사상체계를 오직 이성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반면, 코메니우스는 지식습득에는 이성과 더불어 인간의 감각과 하나님 계시의 증거가 필요함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후에 여러 글들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잘 분석해 내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란 명제를 비판하게 되는데, 생각할 때만 존재하고 잠잘 때는 존재하지 않는지를 반문하면서, 인간은 생각하면서도, 행동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데까르트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의 이원적인 분리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Cartesianer)의 데까르트에 관한 왜곡을 비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말년에 암스테르담에 산재해 있는 데까르트주의(Caetesianismus)적인 사고를 “철학의 암적훼손‘(Der Krebsschaden der Philosophie)이라고 비판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때 1642년 8월 50세의 나이에 역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간다. 거기서 스웨덴의 수상 옥센스티에르나(A.Oxenstierna)를 만나고, 루이스 데 기어(R. de Geer)의 재정후원으로 스웨덴의 학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교재 집필을 위임받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이 작업을 스웨덴의 영토였던 독일의 동북해안에 있는 도시 엘빙(Elbing)에 거하면서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곳이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리사와 거리상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연합교회를 돌보는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스웨덴의 학교교재 집필 외에도, 그가 후에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세계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서를 준비하였다.

1648년 56세가 된 코메니우스는 리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도로테아(Dorothea)가 병으로 죽게 된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 종교전쟁은 마지막 국면에 이르게 된다. 가톨릭 편인 프랑스와 프로테스탄트 편인 스웨덴 사이의 전쟁은 뮌스터 오스나부릭에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Westfallia Friede)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형제연합교회의 종교자유는 보장받지 못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고향이며 조국인 보헤미아는 적그리스도인 가톨릭의 통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역시 형제연합교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1650년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에 드리는 위로의 글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은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교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형제연합교회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상기시키면서, 형제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유산인 6가지를 보존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진리의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를 소망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직이었다. 1649년 57세 나이에 요한나 가요소바(J.Gajusova)와 함께 세 번째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하도록 코메니우스는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항가리의 사로스파탁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로 개혁하는 일을 해달라는 초청으로 그곳으로 먼저 가게 된다(1650년).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곳에서 학교 교육의 책임자가 되었고, 그 유명한 두 권의 교재인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Orbis sensualium pictus)란 책과 놀이학교(Schola Ludus)를 출판하게 된다. 전자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으로 언어와 세계의 자연 피조물과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한 모든 지혜학습의 모범적인 책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학교를 아이들의 놀이의 장, 즐거움의 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고, 연극 상연 등을 하도록 대본을 제시한 책이었다.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의 책은 1658년에 준비하여 라틴어-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역시 항가리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를 지지하던 영주 라콕지(Racockzy)가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사로스파탁의 사람들에게서 코메니우스가 원했던 범지혜의 교육에 관한 관심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사에서 형제연합교회는 코메니우스가 다시 리사로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3번째 다시 리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 역시 코메니우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은 끝났지만,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대립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스웨덴이 폴란드에서의 전쟁으로 코메니우스가 제2의 고향처럼 머물렀던 리싸가 가톨릭 군대의 침입으로 정령 당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집과 모든 서재가 불타게 되었고, 그가 그동안 작성하고 준비했던 원고들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황급히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피난처를 또 찾아야만 했었다.

원래 코메니우스는 영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코메니우스 인생의 마지막 기간이 암스테르담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그는 이전에 큰 도움을 받았던 화란의 거부, 루이스 더 기어(Louis de Geer)의 아들인 라우렌티우스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코메니우스는 14년을 살게 되었다. 코메니우스 옆에는 그의 사위 피터스 피굴루스 야불론스키(P.P.Jablonsky)가 동행하였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큰 작업에 열중하였는데, 하나는 교육학 총서(Opera didactica omnia)를 출판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시도했던 “인간사 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의 글을 완성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모든 교육과 관련된 문서들을 총 집결시킨 교육학 총서는 암스테르담의 시 정부의 재정후원으로 출판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코메니우스의 곁에는 30년 종교전쟁과 관련하여 예언가들이 항상 동행하였는데, 크리스토퍼 코터, 크리스티나 포니아톱스카, 니콜라우스 드라빅 등의 인물들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때때로 그들의 예언들에 귀를 기울이는 일로 일찍이 형제연합교회에 고소당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계시의 역사”란 글과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이란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드라빅의 예언인데, 그는 30년 종교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고,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했으나, 그 예언은 적중되지 않았으며,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심지어 코메니우스의 옛 제자였던 폴란드의 형제연합교회에 속한 니콜라우스 아르놀드(N.Arnold,1618-1681)의 코메니우스에 대한 비판은 코메니우스에게 큰 충격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예언과 관련하여 당하는 여러 비판을 그냥 묵과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1665년에 “어두움에서 나아온 빛”(Lux a tenebris)이란 책을 출판하여, 긴급한 전쟁의 위기상황에서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이 형제연합교회의 미래를 밝히는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드라빅(Drabik)의 소리에 경청했던 사실을 고백하였으며, 그러나 하나님의 성경 말씀의 계시 외에 인간구원의 어떠한 계시는 없음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의 노년기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지속하였는데, 형제연합교회의 찬송가와 신앙교육을 위한 요리문답서,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에 관한 글, 교회법의 개정과 형제연합교회의 옛 신앙고백서의 개정판 등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정치와 직접 연관된 3편의 글, 삼단논법(Syllogismus),독일을 향한 마지막 나팔(Die letzte Posaun ueber Deutschland), 그리고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등을 저술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평화의 천사는 직접 그 당시 정치가들을 겨냥했던 것으로, 그 대상은 1664-1667년 사이에 있었던 계속된 영국과 네델란드 사이에 두 번째 해전을 종식 시키려고, 브레다(Breda)에 모였던 양국의 사절단들이었다. 바다의 항해권으로 다투고 주도권을 주장하는 그들에게 바닷길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그 주인이 하나님이며, 그 바닷길은 평화롭게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공동의 것이지, 어느 개인 한나라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해상권 다툼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코메니우스가 직접 그 회담에 사절단으로 참석하여 연설하였는데, 그의 연설에 감화를 받고,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는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거의 인생의 마지막에까지 삼위일체 존재 방식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단일신론을 강하게 주장하여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던 소시니안주의에 대항하여 많은 비판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코메니우스가 죽기 전해에, 흐로닝겐 대학의 교수였던 칼빈주의자 마레시우스(S.Maresius,1599-1673)에게서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천년왕국론에 대표적인 인물로 코메니우스와 라바디를 지적하면서 비판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코메니우스는 잦은 질병으로 더 이상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충분히 변호할 만한 상태에 있지 못했다.

코메니우스는 마지막 작품으로 “꼭 필요한 한 가지”(1667-1668)를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코메니우스의 유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희망을 다시 한 번 감동적으로, 친밀하게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코메니우스는 먼저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행복은 첫째, 이성의 밝은 빛 가운데서, 둘째, 일 더미 속에서 일할 때, 그 일들이 적절한 순서에 따라 진행될 때이며, 셋째, 이생의 소유를 확실히 누리는 것에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이 왜 그렇게 잘 실현되지 않는지에 대하여 ‘미로’란 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의 미로에서 나올 수 있는 탈출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혼란들은 오직 한 가지, 즉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음을 전제하고, 필요한 것을 간과하고, 불필요한 것에 끊임없이 몰두하며, 그것에 뒤엉켜 휩쓸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규칙(말씀)만이 오직 세상의 미로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출구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그러면 인간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자신을 알며, 자신을 다스리며, 자신을 사용하고,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이것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 3가지 영역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그가 말한 교육을 포함한 학문, 정치, 종교의 개혁이었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그의 형제연합교회의 사역은 교회연합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사역은 이러한 일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분명히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이끌던 작은 형제연합교회가 전 세계의 모든 민족 가운데, 곳곳에서 세워지기를 소망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관계하던 작은 형제연합교회는 문을 닫고, 두 가지 책 출판과 함께 전 세계를 향하여 큰 형제연합교회의 문을 열어젖히기를 희망하였다. 하나는 그의 조국을 위하여 모국어로 쓴 책이며, 다른 하나는 다른 민족들을 빨리 계몽하기 위하여 라틴어로...쓴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사의 관계개선에 관한 보편적인 제언”이란 세계개혁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총 7권으로 구성된 그의 책을 부분적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기고, 1670년 11월 15일 78세의 나이로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 그는 암스데르담의 근교 나르덴에 있는 화란 개혁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3) 코메니우스에 관한 현대 신학자들의 평가와 그의 신학적인 위치

유럽교회와 신학의 역사는 약 3세기 동안 신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를 잊고 있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17세기 프랑스에 출판된 ‘역사적이며 비판적인 권위를 가진 삐레 베일(Pierre Bayle)의 사전’ 때문이었다. 그 사전은 신학자로서의 코메니우스에 관해서는 침묵한 채, 그의 생존 기간에 부분적인 활동이었던, 학교의 교사요, 언어의 교수학자요, 백과사전적인 교재집필자에 한정된 교육자로만 소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5년,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본산지였던 할례(Halle)에서 발견된 코메니우스의 미완성유작(“인간사 개선에 관한 포괄적인 제언”)의 라틴어 원본은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학문적인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놓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문서들은 제목이 뜻하는 그대로 인간이 관계된 모든 일들이 올바른 관계의 질서 속에 세워지도록 유럽 사회를 개혁하려는 그의 제언들이 담겨 있었고, 그의 모든 생각들은 성경에 근거한 것으로, 신학적이며, 철학적이며 교육적인 것들로 엮어진 종합적인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들은 기독교적인 삶을 대변할 뿐 아니라, 철학적이며, 우주적이며, 인간학적인 그 시대의 사상들을 대변하였고, 특히 종교개혁이 완성하지 못한, 삶(세상)의 개혁방법을 포괄적으로 담아 놓은 그의 신학 작품이었다. 그 안에서 코메니우스는 모든 유럽의 지성(철학)인들과 정치인들과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요청하였고, 특히 교육과 정치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 코메니우스가 “인간사 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consultatio catholica)을 통해서 성취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코메니우스의 핵심교육철학인 판조피아(Pan- sophia)와 관계되어 있다. 우리말로 범지혜(汎知慧), 또는 ‘모든 지혜’로 번역된다.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그 내용과 존재 방식과 존재 목적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원래 목적대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양심적인 자유의지의 사용(usus)이 왜곡될 때, 무질서와 혼돈이 거기서 야기되는 것으로 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의 근원과 방편과 목적에 대한 앎은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는 것과 연관되었다. 결국 코메니우스에게서 판조피아(Pansophia)는 하나님에게서 나아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전체 과정에 대한 올바른 지적인 이해를 뜻하며(롬11:36), 인간은 그 과정에서 모든 지혜(내용, 방법, 목적)를 헤아리고, 본래 목적한 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자유의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판조피아(Pansophia)사상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는데, 골1:27-28절은 결정적인 근거이다. 바로 자유의지의 선용 때문에 코메니우스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행동할 것을 목표하였다. 물론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완전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뜻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7권 각각의 책 앞에다 이와 같은 전체를 가리키는 판(Pan)의 개념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첫 번째 책인, 범각성론(Panegersia)의 서문에서 코메니우스는 범개혁의 의도한 바를 상세히 밝힌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다스려야 할 세상 사물들(자연/피조물)과의 관계이며, 진지하게 서로 대화해야 할 동등한 다른 사람(이웃)들과의 관계이며, 또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된 지식(경건)들을 알게 해 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영원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의지는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과의 교제를 위한 준비에 힘써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학문(eruditio)과 정치(politia)와 종교(religio)의 3가지 영역에 관계된 지식들로서, 그것이 바로 인간사(人間事)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이 3가지 영역의 일들이 무질서와 혼돈가운데 놓여 있는데, 그것들이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임을 느끼고, 그것의 개선(改善)에 대한 소망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도록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원상태, 즉 낙원의 상태는 인간의 타락으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학문과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관계된 것들로서, 그간 여러 개혁(루터,쯔빙글리,멜란히톤,부쳐,칼빈,부게하겐 등)들이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먼저 종파 간에 서로를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는 한, 종파들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더욱 늘어났으며, 적대감을 가지고 없애려 했으나, 더 날카로워지기만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학문적인 작업은 많으면 많을수록 학문은 더욱 엉클어져 갔기 때문에, 이제는 먼저 병폐를 찾고, 치유책을 찾으며, 이 두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지금까지의 개혁의 시도들이 종교, 정치, 학문의 어느 한 특정한 부분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며, 온전한 개혁은 이제 이 3가지 영역에서 포괄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체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삶의 개혁이며, 그것을 세계개혁으로 부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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